한국 창작 뮤지컬 〈모래시계〉는 한국인의 ‘격동의 80–90년대’를 다시 호출하는 대표적인 무대 텍스트다. 누군가에게는 군홧발과 최루탄의 냄새로 상징되는 공포의 시대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급작스러운 성장과 도시의 불빛이 뿜어낸 황금의 시절이다. 작품은 이 양가적 기억을 한 무대 위에 올려놓고, 국가권력·자본·비공식 폭력의 뒤엉킴을 개인의 선택과 우정의 비극으로 압축한다. 역사가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읽을 때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서사의 사실성과 심미적 허구가 만드는 ‘감정의 진실’이 어떻게 공존하는가. 둘째, 작품이 드러내는 구조적 폭력의 맥락이 실제 역사와 어디서 만나는가. 셋째, 이 무대가 오늘 관객의 집단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재조직하는가이다. 이 글은 〈모래시계〉를 (1) 사실과 허구, (2) 권력·자본·폭력의 삼각구도, (3) 기억이라는 세 축으로 분석한다. 분석의 목적은 작품의 선악 구도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기억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감수성을 어디까지 확장·갱신하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1) 사실과 허구
〈모래시계〉는 개발독재의 그림자 아래 전개된 공안통치·학생운동·노동현장의 긴장을 다층적 장면으로 압축한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들의 조용한 거래, 최루 연기와 방패 라인의 충돌, 조사실의 백색 조명 등은 단지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치가 아니다. 이는 당시의 제도적 폭력이 공적·사적 공간을 가리지 않고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시각적 리얼리즘’으로 환기한다. 서사적 디테일이 모든 역사적 사건의 연표를 충실히 따르지 않더라도, 관객은 당시의 공기, 즉 공포와 분노, 체념과 연대의 뒤섞임을 체감한다. 사실의 압축과 인물의 합성은 예술적 필연이다. 뮤지컬은 러닝타임 내에 폭주하는 사건을 직조해야 하므로, 실제로는 장기간에 걸친 변화가 한두 장면으로 응축된다. 검사·정보요원·기업가·조직폭력배의 관계망 역시 ‘대표 인물’에 집약되어 제시되곤 한다. 역사가의 독법으로 보면 이것은 ‘개연성의 사실화’ 전략이다. 특정 인물이 여러 유형의 역사적 경험을 대리 표상하도록 함으로써, 구조적 현실을 관객의 정서로 번역한다. 다만 이 과정은 언제나 왜곡의 위험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관객은 작품이 제공하는 ‘연대기’가 아니라, 그 연대기가 던지는 구조적 질문권력은 어떻게 사적 폭력을 위임했고, 시민사회는 어떤 균열과 연대를 경험했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무대예술은 사료(史料)가 아닌 사유(思惟)의 매체다. 그럼에도 〈모래시계〉는 ‘감정의 진실’을 통해 역사적 상식의 지형을 바꾸는 힘을 갖는다. 모래가 떨어지는 이미지, 돌아갈 수 없는 우정의 파열, 질문으로 끝나는 결말은 ‘한 시대가 개인에게 남긴 손실’을 정량화 불가능한 상처로 드러낸다. 역사가가 요구하는 사실검증(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은 중요하지만, 이 작품이 묻는 것은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떤 정서적 압력을 견뎌야 했는가’다. 감정의 진실은 통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바로 그 대목에서 예술적 허구가 역사 이해를 돕는 우회로가 된다.
2) 삼각구도
작품은 국가권력이 비공식 폭력을 하청하는 장면들을 여러 방식으로 변주한다. 공개적으로는 법과 질서를 내세우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조직폭력의 ‘노동력’을 빌려 야당·노동·언론을 압박하는 구조, 이것이 80–90년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뮤지컬은 이를 추상화된 무대 전환으로 보여준다. 법정의 언어와 골목의 주먹이 같은 목표를 향할 때, 두 세계는 사실상 하나의 시스템이 된다. 이 시스템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깨끗한 장부’와 ‘더러운 손’의 대비다. 장부는 합법을 말하지만, 손은 합법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힘을 쥐고 있다. 자본은 폭력과의 결합을 통해 공간을 장악한다. 작품 속 카지노·재개발·항만과 같은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이윤의 회로가 실제 도시 공간을 어떻게 재배치하는지를 드러내는 지리학적 장치다. 화려한 조명과 군무는 소비의 유혹을, 뒤편의 거래 장면과 은밀한 회의는 권력의 사적 편의를 시각화한다. 경제 성장과 도덕의 괴리가 커질수록, 개인의 윤리적 선택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된다. 작품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선한 개인이 악한 구조를 이길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이며, 그 답을 쉽게 내리지 않는 태도 자체가 역사적으로 설득력 있다. 그러한 삼각구도는 개인의 일상을 얼마나 침식하는가. 검사·폭력배·재벌 2세(혹은 상속인)라는 세 인물의 교차는 사회적 위치에 따른 도덕적 딜레마의 양태가 다르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공익과 출세 사이에서 갈라지는 공직자의 마음, 의리와 생존 사이를 오가는 청춘의 선택, 가족 기업의 부담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상속인의 고민이 모든 것은 ‘나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쁘게 설계된 게임의 규칙’에서 비롯된다. 역사가의 언어로 바꾸면, 이는 전환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의 질문과 닿아 있다. 잘못된 과거의 제도와 관행을 어떻게 청산하고, 피해와 가해의 회복적 정의를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모래시계〉는 뚜렷한 해답 대신, 상처의 깊이를 측량하게 한다.
3) 기억
〈모래시계〉는 한 세대의 ‘기억의 장소(lieu de mémoire)’를 재건한다. 원작에 대한 향수는 개인적 추억의 층위를 복원하고, 뮤지컬의 음악·조명·무대 전환은 그 기억을 집단적 감정으로 증폭한다. 관객이 노래한 줄, 대사 한 마디에 동시에 숨을 삼키는 순간, 공연장은 일종의 공동 체험의 박물관이 된다. 이 박물관은 유물 대신 감정을 전시하고, 해석 대신 공명을 호출한다. 역사교육이 서사와 정조를 통해 더 깊게 각인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기억은 세대 간 언어를 만든다. 40–50대 관객에게 작품은 ‘그때의 우리’를 거울처럼 비춘다. 반면 10–20대에게는 교과서의 문장을 넘어선 ‘정서의 역사’를 제공한다. 커튼콜에서 관객이 보내는 기립박수는 단지 배우의 기량에 대한 찬사만이 아니다. 그것은 애도의 의례다. 실패한 우정, 늦은 정의, 가려진 죽음을 향한 늦은 작별 인사다.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이 의례는 과거를 봉인하는 장치가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흔드는 방식을 안전하게 통로 화하는 사회적 기술이다. 그러나 기억의 정치에는 언제나 배제의 위험이 있다. 폭력의 미학화는 관객에게 달콤한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실제 피해의 서사는 쉽게 주변화될 수 있다. 또한 여성·이주노동자·지역 하층민과 같은 하위주체의 목소리가 주된 서사에서 소멸할 위험도 있다. 따라서 책임 있는 감상과 연출은 몇 가지 원칙을 필요로 한다. 폭력의 원인을 개인의 일탈로 환원하지 말 것, 피해의 경험을 서사의 추동력으로만 소비하지 말 것, 결말에서 ‘정의의 승리’라는 단순한 봉합 대신, 남겨진 과제를 분명히 드러낼 것.〈모래시계〉가 오래 살아남으려면, 이 원칙들이 공연의 미학과 제작의 윤리 속에 꾸준히 반영되어야 한다.〈모래시계〉는 ‘사실의 정확성’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의 결을, 무대예술의 언어로 번역해낸 작품이다. 역사가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뮤지컬의 가치는 세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 허구적 압축을 통해 역사적 구조의 본질 국가권력의 외주화 된 폭력과 그에 맞선 시민의 감정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둘째, 권력·자본·폭력의 삼각구도가 개인의 윤리적 선택을 어떻게 포위하는지 보여 주며, 전환기 정의의 문제를 관객의 일상 윤리로 끌어온다. 셋째, 대중서사가 만들어내는 공동의 기억과 애도의 장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감수성을 갱신하는 집단적 경험을 제안한다. 관객에게 권하는 감상법은 간단하다. 공연을 보며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침묵하게 되는가’를 묻고,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이 공간(카지노·재개발지·조사실)의 권력 관계는 무엇인가’를 확인해 보라. 마지막으로, 결말이 던지는 허무와 분노를 ‘끝’이 아니라 ‘시작’의 정서로 전환해 보라. 작품은 과거를 회고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의 우리에게 불편한 현재형의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을 붙드는 순간,〈모래시계〉는 더 이상 추억담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육을 단련하는 시민교육의 무대가 된다.